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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5 11:23 THINK/Reith Lectures 2009


* 도덕적/종교적 가치와 정치

  사람들은 도덕적, 종교적 가치가 정치적 논의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부가 특정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고 행동하지 말고 중립적인 입장에서(혹은 흔히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는 '국민의 편에 서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틀렸다. 1) 많은 사회적 문제들에 있어서 정부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2)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논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


* 모든 사회적 행위에는 그에 알맞는 목적과 가치가 있다

1) 돈을 주고 대리모를 구하는 문제
  불임문제를 겪고 있는 어떤 커플들은 아이들을 갖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입양은 원하지 않는다.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는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가능할 경우, 그들의 정자와 난자를 가지고 대리모를 고용하여 10달동안 임신을 대신하도록 하는 방법을 쓴다. 대리모가 10달 동안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대리모는 그 아이를 부부에게 준다.

 
  돈을 주고 대리모를 고용하는 행위는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불법이지만, 미국에서는 몇몇 주가 허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설사 허용하더라도 그 가격을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러한 법적, 경제적 문제 때문에 많은 커플들이 - 다른 산업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 대리모를 노동력이 싼 제3세계 국가로 아웃소싱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2002년, 인도는 대리모를 합법화함으로써 서양의 부모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뭄바이의 한 산파에 따르면, 그녀는 48시간마다 한 명씩 영국 부부 대리모의 아이를 받는다고 한다. 시장 효율성의 관점(즉, 경제학적 관점)에 따르면, 이건 좋은 상황이다. 인도의 대리모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받는 돈(약 800만원)은 그녀가 15년 동안 일해서 벌만한 돈이다.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인도의 대리모는 아주 싼 값(약 1/3)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모든 사람이 이익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국제시장에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 한 이유는 '동의'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그 대리모가 정말로 자의에 의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기로 결정하였는가 아니면 가난이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인가? 하지만 그 이상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 바로 '가치저하degradation'에 관한 문제이다. 임신과 자녀를 상품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그 의미를 존중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Anderson은 돈을 주고 대리모를 고용하는 행위가 가치저하(본연의 가치에 걸맞게 존중하지 않게 되는 것)의 문제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1) 아이를 보호와 애정의 대상이 아닌 수익의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아이의 가치'를 저하(혹은 변형)시키고, 2) 여성을 공장처럼 대우함으로써 '여성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3) 임신을 위해 돈을 지불함으로써 엄마와 임신, 아이를 분리시키고, 아이와의 유대감 형성이라는 '임신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사회적 행동에는 그에 알맞는 목적과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행동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회적 행동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야한다는 것이다.

2) 누가 가장 좋은 플룻을 소유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Theory of Justice'
  "정의란 각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는 것을 주는 것이다(Justice is giving people what they deserve)"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이다. 예를 들어, 누가 가장 좋은 플룻을 소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룻을 가장 잘 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가장 음악이 플룻을 통해 흘러나올 것이고, 그러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유는 다르다. 그는 플룻을 가장 잘 부는 사람이 가장 좋은 플룻을 소유해야하는 것은, 잘 불려지고,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플룻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것이 뛰어난 음악가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어떤 사회적 행동이 어떤 이익과 결과를 낳느냐가 아니라, 그 사회적 행동의 본질적 가치가 무엇이냐, 그 본질적 목적이 무엇이냐가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그 판단이 쉬워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플룻의 존재 목적에 대해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라면 어떨까? 사회적 행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주장과 근거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는 문제인가?


* 본질에 대한 가치판단의 필요성

1) 골프카트 허용논란
 
 전 PGA골퍼
케이시 마틴Casey Martin은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었지만, 어렸을 때 부터 혈액순환관련 질병을 앓고 있어서 걸어서 18홀을 걷는 것이 골절로 이어질 수도 있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행위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 않는 한도내에서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해야한다"는 미국 장애인법에 의거, 코스 이동시에 골프카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PGA 요청했지만, PGA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골프카트를 탈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소송을 걸었고, 이 소송은 결국 대법원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 재판에서 아놀드 파머와 같은 골프계의 전설들이 증언을 하게되는데, 이들은 모두 그린을 걷는 것이 골프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카트사용을 허락하는 것은 불공평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재판이 진행되면 될수록, 재판부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그린을 걷는 것이 골프라는 스포츠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인가 아니면 단순히 우연히 혹은 필요해서 하게 된 행동일 뿐인가? 재판부는 케이시 마틴의 권리를 판단하기 위해서 "골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문에 답해야 했던 거다. 결국 재판부는 7:2로 케이시 마틴이 카트를 탈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골프의 본질은 막대기로 공을 쳐서 조그마한 구멍에 집어넣는 것이고, 카트를 타는 것은 골프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케이시 마틴의 골프카트 논란의 초점은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평등'이 초점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평등'만 문제였다면,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그냥 모든 골퍼들이 다 카트를 타게 하면 되니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쉽고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할 일 많은 대법원은 무슨 재판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PGA와 다른 프로골퍼들은 카트를 못하게 막고 난리인가. 그냥 다 같이 타면 되잖아.

  그러니까 문제의 초점은 '평등'이 아닌거다. 초점은 골프의 본질, 골프에서 존중하는 가치, 골프에 대한 지위, 인식이었다. PGA와 골퍼들은 골프의 '스포츠', '운동경기'로서의 지위에 상당히 민감하다. 골프가 여러가지 스킬을 필요로하는 스포츠임에는 틀림없지만, 골프는 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뛰지도 않고, 점프도 없고, 몸을 부딪히는 일도 없으며, 공은 그냥 가만히 멈춰있다. 그러니까 PGA는 골프가 육체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운동경기로서 인정을 받는 게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거고, 골퍼들도 육체적인 스킬을 가진 '운동선수'로 인정받는 문제에 있어서 민감할 수 밖에. 따라서 골프에서 그린 위를 걷는 행위는 골프와 골퍼가 '운동경기', '운동선수'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그렇기 때문에 카트를 허용하지 않은 거고. 어떤 골퍼가 카트를 타고 다니면서 골프를 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들의 이러한 지위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케이시 마틴의 골프카트 논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재판부면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장애인의 권리와 평등에 대해서 공평부당하게 판단을 해야할 것 같지만, 결국 골프의 본질에 대한 가치판단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권리에 대한 논쟁은 종종 사회적 행위나 제도의 목적, 그를 고양시키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논의를 수반한다.

2) 동성결혼 허용논란

  자, 이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현재 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동성결혼 허용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제는 미국, 유럽 등 서양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문제이고(동양의 경우 아직 먼나라 얘기일 뿐이지만), 미국의 몇몇 주는 동성결혼을 허용했고, 유럽의 여러국가들은 결혼은 아니지만 결혼과 동등한 법적권리(상속권, 양육권, 배우자로서의 광범위한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연합Civil Union/Civil Partnership의 형태로 동성간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국가가 남자와 여자사이의 결혼과 똑같이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해야하는가? 어떤 이는 그래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이 문제를 중립적인 기준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그러니까, 옳다 그르다에 대한 판단을 하지말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관계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사람은 자신이 결혼할 파트너를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국가가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된다면, 이 문제가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동성결혼에 대한 문제는 중립적이고 가치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골프카트 허용논란과 마찬가지로 이 논란 또한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를 통해 고양하려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며, 따라서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관계가 국가가 인정하는 결혼제도를 통해 존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관계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 거론되는 2가지 대응방식이 아니라, 3가지 정책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 결혼은 이성간에만 허용하고, 동성간에는 시민연합의 형태로 허용하는 방법(영국의 경우), (2) 이성간과 마찬가지로 동성간에도 똑같이 결혼을 허용하는 방법(미국 메사추세츠주의 경우), (3) 국가가 아예 결혼에 대해서 관여를 하지 않고, 그 역할을 다른 단체나 종교 단체가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는 방법. (3)의 경우는 시행하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가상의 정책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식이다. (3)은 결혼제도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지만, 국가가 공인하는 형태의 결혼은 폐지하는 방법이다.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킨슬리Michael Kinsley는 동성결혼 허용을 둘러싼 논의가 해결될 수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말하면서, (3)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교회나 다른 종교단체들이 계속 결혼식을 집행하도록 하라. 백화점이나 카지노도 원한다면 결혼식을 집행할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3명이서 결혼하기를 원하든, 아니면 혼자 스스로 결혼하기를 원하든, 누군가 와서 결혼식을 집행하고 그들이 결혼했다고 선언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는 이를 통해 국가가 공인하는 결혼을 이성간이든 동성간이든 연합의 형태로 대체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동성결혼 허용을 찬성하는 측이든, 반대하는 측이든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3)의 방법은 이 문제를 논의할 때 어느 쪽이든 결혼의 목적과 그것을 통해 고양하고자 하는 가치와 미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판단을 가지고 논쟁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성결혼의 권리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판단이나 결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논의를 피하면서, 이것이 선택의 자유와 차별금지에 대한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선택의 자유'와 '평등'만 문제라면, 국가는 결혼을 두 사람 사이로만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합의만 한다면, 여러 사람이 결혼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국가가 정말로 중립적이고 가치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개인의 판단을 존중한다면, 국가는 킨슬리의 주장대로 결혼을 공인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골프카트 허용 논란의 경우에서 모든 골퍼들이 카트를 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이다.

  그러니까, 동성결혼 허용논란의 포인트는 '선택의 자유'나 '평등'이 아니라 동성간의 관계가 이성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존중과 인정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관계가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결혼의 목적과 그 가치를 충족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는 거다. (아, 졸라 감동)

Margaret H. Marshall  메사츄세츠 주법원은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주법원은 중립성과 선택의 자유에 기반한 주장이 일리있다고 말하면서도, 다부다처제의 결혼을 인정하거나, 결혼의 공인을 그만두거나, 결혼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메사츄세츠 대법원장인 마가렛 마샬Margaret Marshall은 판결문에서 자유주의적인 중립성에서 벗어나서 동성간의 관계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결혼의 목적에 대한 시각을 제시했다. 그녀는 결혼이 단순히 성인 두 사람이 사적으로 상호합의를 하는 것이 이상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결혼은 [관계에 대한] 공적인 존중과 인정의 형태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사회적 결혼제도에는 3명의 주체가 있다: 결혼을 하고자 하는 2명의 파트너와 이를 공인하는 국가"

  만약 결혼이 인정하고, 공인하고, 가치를 존중하는 제도라면, 과연 그것은 어떤 가치를 존중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바로 결혼의 목적에 대해서 묻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논란의 핵심이다. 동성결혼 허용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혼의 목적이 자녀를 낳는 재생산에 있다고 주장한다. 동성커플은 재생산을 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결혼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반대논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고, 마샬은 이 논리를 반박한다. 그녀는 지금의 국가가 인정하는 이성간의 결혼에 있어서 자녀를 낳을 능력이나 의도가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으며, 자녀를 낳을 생각이나 계획이 없는 사람들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도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재생산은 결혼의 본질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공인하는 결혼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두 사람간의 서로에 대한 독점적이고 영속적인 헌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증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 현재 존재하는 결혼제도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해석, (2) 결혼제도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를 고양시키는 쪽인지.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결혼제도가 어떠한 가치를 확인하고 존중하고 고양시켜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지에 부분적으로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저에 깔려있는 도덕적, 종교적 논쟁이 불가피한 것이다. 동성애 관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판단은 무엇인가? 마샬도 이 질문에 대해서 중립적이지 않다. 그녀는 재판에서 동성애 관계가 이성애 관계 만큼 존중할 가치가 있는 관계라고 판단했다.
 

* 민주주의 사회에서 논쟁public discourse의 중요성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과 분리시키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잘못되었다: (1) 정의와 권리와 문제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하는 도덕적 가치판단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플룻이든, 대리모 문제이든, 골프 카트이든, 동성결혼이든), (2) 설사 도덕적 가치판단이 필요 없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해도,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해결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민주주의 사회에서 논쟁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에 우리는 마치 다른 시민들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무시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최대한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상태에서 논의하는 것이 그것을 존중하는 방법인 것 처럼 행동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도덕적 논쟁을 피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억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억압이 반작용을 낳았고, 그것이 최근에 늘어나고 있는 극단적 종교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의 원인이다. 상호존중에 기반한다면, 서로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차이에 대한 논쟁은 사회를 더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는 도덕적, 종교적 논쟁을 피하지 말고, 좀 더 직접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때로는 그러한 신념에 도전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들으며, 배우기도 하면서 말이다.

  도덕적인 가치를 포함시키는 정치는 그것을 피하는 정치보다 더 이상적이다. 만약, 정의에 대한 우리의 논쟁이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필요로 한다면,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는 정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좀 더 나은 기반이 될 것이다.


* 내 생각

  일단, 졸라 감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좋은 플룻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하는 간단한 정의에 대한 문제에서, 복잡한 문제인 골프카트, 동성애 결혼 문제로 점점 더 옮아가는 논증의 기술이 정말로 탁월한다. 동성애 결혼 문제를 맨 처음에 제시했다면 많은 물음표가 따라 붙었을 텐데, 좀 덜 복잡한 두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니까,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라는 점이 명확해 진다. 이건 논증 전개의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감탄.

  난 이념적으로 샌델이 언급한 자유주의자liberal에 가깝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마인드가 "뭔 상관? 니 일이나 신경쓰셔"라는 식이며, 각 사람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다른 사람 고유의 권리에 침범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대마초를 하든, 스와핑을 하든 간에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뭔 상관이냐.

  그래서 동성결혼 허용 문제에도 같은 스탠스를 취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 관계가 좋다 나쁘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으며, 그게 동성결혼 허용 문제에서 전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성결혼을 니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남이사 지가 누구랑 결혼하든 너랑 뭔 상관? 너한테는 그런 권리 없어. 그러니까 냅둬." 이게 나의 동성결혼 허용 논리를 rough하게 요약한거다. 동성관계에 대한 가치판단은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배제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해결되지 않는, 쓸데없는 논쟁만 유발시키니까. 샌델이 얘기했던 것 처럼, 이건 "선택의 자유"와 "평등"의 문제이고 따라서 "중립적"으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거지.

  그러다가 샌델한테 한 방 먹음. 골프카트 논란까지는 "오호라~"하면서 재밌게 따라가다가 동성애 결혼 문제에서 헉. "그러네. 정말 자유주의적인 이상적 해결책이라면 3명이서 결혼하든, 100명이서 결혼하든, 혼자서 결혼하든 상관하지 말아야 겠네. 국가가 간섭을 안해야 겠네. 흠... 근데 그게 바람직 한 걸까?" 뎅- 그렇다. 이 "바람직"이 나온 순간 나도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거다. 결혼제도의 본질의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리고 어떤 관계가 그러한 본질과 목적에 부합하는 지에 대한.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샌델한테 완전 딱 걸린거지.

  이 강의는 사회문제에 대한,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나에게 제시해주었다. 난 여전히 자유주의적 잣대로 많은 문제를 판단하지만, 그렇게 중립적이고 가치를 배제한 판단방식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님을,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니까 샌델은 그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논쟁을 벌여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도덕적, 종교적 신념은 그냥 각자의 믿음이니까 내버려 둬야 한다는 스탠스를 취하곤 한다. 오히려 그런 관점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에 대해 "편파적이다",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 "어떻게 사회정의를 논하는데 니 도덕적 관점을 들이대냐"는 식으로 대응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합당한 권리인지에 대한 판단은 반드시 대상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판단과 도덕적 관점을 필요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사회의 주요 의제를 설정하고 판단을 내리는 정치에서도 그런 판단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샌델은 말하고 있는 거고(그래서 2강의 주제는 Morality in Politics),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이 이런 가치를 두고 서로 듣고, 논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고(그래서 Reith Lectures 2009의 주제는 A New Citize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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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그스